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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꽁트)

용 팔뚝 아저씨와 혀 꼬부라진 아저씨

by 錦繡江山 2012. 12. 18.

 

 

 

 

며칠 전 퇴근길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눈 오고 난 그다음 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탓에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 따뜻함이 달콤한 수면제로 변하며

나를 막 잠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그때...

 

험상궂은 얼굴...

짧은 스포츠머리...

키는 작아 보이지만 떡 벌어진 어깨...

다부진 체격의 50대 남자가 버스에 올랐습니다.

두세 개의 빈 좌석이 있었지만... 그는 앉을 생각은 아예 없는 듯...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웃옷을 벗어 가방 위에 올려놓고

난방 셔츠의 소매를 반쯤 걷어붙인 다음....

버스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그때...

잠을 자고 있지 않던 승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 남자 팔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팔뚝에는 커다란 용 한 마리가 울퉁불퉁한 근육을 감아 오르고

손목 근처에 다다른 용의 입에는 여의주 대신 회칼을 물고

사나운 눈초리로 승객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섬세하게 새겨진 용문신은 그 분야의 대가 께서 손수 작업하신 듯...

꿈틀거리는 비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

그리고 번뜩이는 칼날...

그것은 마치 백자의 청화 그림만큼이나 대단한 걸작이었습니다.

 

승객들은 순간 긴장하면서도 그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데

드디어 용 팔뚝 아저씨가 쫙~~ 깔린 중저음으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 저는 열흘 전... 15년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나와보니... 많은 것이 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고...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래도 교도소에 있을 때는 별이 몇 개 되었기 때문에

대우받고 살았는데...

몇 푼 받아가지고 나온 돈은 그동안 먹고 자고 쓰다 보니... 

이젠 껌 몇 통 살 돈밖엔 안 남아서... 어쩌겠습니까!...  

껌이라도 팔아서 먹고살아야지요.

여러분 껌 1개당 천 원씩만 받겠습니다.

이천 원 주셔도 좋고 또 만원씩 주시면 더 좋고요.

요즘 경기가 어려워 힘든 줄 압니다 만 저도 좀 먹고삽시다! "

 

처음에는 중저음 목소리였지만 말이 길어질 수 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승객들은 될 수 있으면 용 팔뚝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자는 척...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바로 그때...

뒷자리에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감히

용 팔뚝 아저씨의 연설을 중지시켰습니다.

" 야!~~~ 음~~~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 경기가 어려운 건 어떻게 알아! "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떠졌고

어느새 용 팔뚝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용 팔뚝 아저씨는 순간 말을 멈추고 그 날카로운 눈을 점점 작게 만들더니

얼음장 같은 눈초리로 뒷자리를 쏘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의 헛소리쯤이야 라고 생각했는지

그 낮은 중저음 목소리로 " 뒤에 아저씨는 빼고......"

그때 또다시 혀 꼬부라진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네가 먼데 나를 빼고 말고 지랄이야~~"

 

이제 버스 안은 긴장의 분위기를 지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용 팔뚝 아저씨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혀 꼬부라진 아저씨 따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지나갈 때 천 원씩만 준비해 주십시오"

용 팔뚝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혀 꼬부라진 아저씨의 일갈이 터져 나왔습니다.

"야!~~ 뭐가 천 원이라는 거야!~~~  X발..."

나는 또 한 번 용 팔뚝 아저씨의 눈치를 살펴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눈이 아까와는 다르게 눈동자가 점점 더 커지더니...

들고 있던 껌을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천천히 뒷좌석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안은 완전히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용 팔뚝 아저씨의

한걸음 한걸음은 승객들의 심장을 두드리는 박자가 되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운전기사도 룸미러를 통해 힐끔 거릴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체... 그 용 팔뚝 아저씨의 발걸음 소리만 세며

그들의 대결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발걸음 멎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동안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버스 안의 공포는 이제 최고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그때 아주 낮은 음성이... 그러나 내 귀에는 좀 이상하게 들리는

용 팔뚝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저씨 왜 이러세요... 한 푼이라도 벌어서 먹고살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방해하지는 말아야지요..."

 

뭐야!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녕... 저 목소리가 그 험악한 용 팔뚝 아저씨 목소리란 말인가?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혀 꼬부라진 아저씨는 방해하지 말라는 그 말이 몹시 거슬렸는지

횡설수설 야단법석을 떨었고 당황한 용 팔뚝 아저씨는

그런 그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버스 안은 공포의 분위기에서 반전되어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져 나왔습니다.

굽힌 허리춤으로 그 팔뚝의 살벌한 용 그림은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승객들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카리스마를 상실한 주인은 꼬리 잡힌 지렁이 꼴이 되어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야 되는 처참한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용 팔뚝 아저씨는 애써... 언뜻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리는데

"아저씨 껌은 팔고 가야지"라는 어느 아주머니 외침에

버스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보기엔 용 팔뚝 아저씨는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당분간 버스에 오르기 힘들듯 한데... 오늘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날 승객 몇 분이 껌을 사주셨는데...

그들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앞으로는 떳떳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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